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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People] KIA 타이거즈 나지완 MEMORIES

dugout*** (dugout***)
2017.08.3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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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역전에 성공한 ‘무등산의 나비’ 나지완

 

상대 투수의 공이 그의 시야에 걸리면 1초의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배트를 휘두른다. KIA 타이거즈가 자랑하는 파워히터 나지완, 밀어쳐도 홈런을 만들어내 타이거즈의 승리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성적과 별개로 성격에 오해를 받아 이미지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욕망이 있듯 역경도 있었던 나지완이 프로 10년 차의 인생을 말한다.

 

Photographer 황미노  Editor 표권향  Location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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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뼛속부터 야구쟁이 

 

어린 시절 ‘골목대장’이었던 나지완은 남다른 포스를 풍겼다. 공부에는 특별한 취미가 없었지만, 힘이 세고 유연해 체육시간만큼은 날아다녔다. 운동에 소질을 보였던 나지완은 ‘야구광’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특히 야구에 소질을 보였다. 그에게 야구는 가장 외로웠을 때도, 인생의 첫 목표가 생겼을 때도 함께였던 삶의 전부였다.

 

광주 출신인데 서울로 야구유학을 갔다고 알려졌다.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태어났다. 친가가 광주인 것은 맞다. 그래서 명절마다 광주에 내려왔었다. 대학까지 서울에서 지내다 KIA에 지명되어 광주에 오게 된 것이다.

 

많은 스포츠가 있는데 야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야구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덩달아 좋아하게 됐다. 생활 체육 야구단 감독을 맡으신 아버지를 일요일마다 따라 다니며 야구에 정이 들었다.

 

아버지의 권유였는가, 아니면 본인이 원했는가.

사실 사연이 있다. 야구를 일찍 시작하지 않았다. 4학년 때 친구와 다퉈 타의에 의해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그곳에 야구부가 있었다. 간식으로 빵을 줘서 한번 했는데 지금까지 하고 있다. (웃음) 그때 (봉)중근이형을 봤다. 신일중-고가 명성을 알리던 때라 야구에 대한 꿈이 더 커졌던 것 같다.

 

‘소년’ 나지완에게 야구란?

정말 가난하게 살았다 보니 ‘야구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죽어라 열심히 했었다. 한창 사춘기로 방황하던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집안이 풍비박산됐었다. 이후 아버지가 나를 키워주셨는데, 꼭 야구로 성공해 큰돈을 벌고 싶단 생각밖에 없었다.

 

유혹이 많았을 텐데, 이 시기를 이겨낸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그땐 종교의 힘을 빌렸었다. 신일중-고등학교가 기독교재단이어서 예배시간이 따로 있다. 그때 성경책을 두 번이나 읽었었다. 지금은 특정 종교에 의지하기보다 나 자신에게 주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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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듭된 노력과 인내 

 

나지완은 고교 시절 리그를 씹어 먹던 ‘에이스’ 투수였으나 부상에 발목을 잡혀 타자로 전향했다.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프로구단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좌절을 맛본 나지완은 단국대에 입학해 파워를 키워 대학야구를 초토화시켰다. 스카우트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은 나지완은 여러 구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프로 데뷔 초읽기에 들어갔다. 드디어 2008년 신인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서 나지완의 이름이 호명됐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를 지명한 구단은 KIA였다.

 

학창시절 주요 포지션은 무엇이었는가.

원래 투수였다. 중학생 때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대회 대표팀에 뽑혔었는데 내가 ‘에이스’를 맡아 우승을 시켰다. (웃음) 그때 멤버가 (송)창식이, (최)진행이었다. 난 개막전 선발투수였으며,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는 승리투수가 됐다. 결승 대만전에서는 완투했었다. 그땐 내가 조금 잘했었다. (웃음)

 

‘에이스’ 투수에서 어쩌다 포지션을 바꾸게 되었는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거의 모든 경기에서 공을 던졌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혹사시켰었나보다. 결국 2학년 때 팔에 부상이 와서 재활했다. 그런데 사람 인생 모른다는 것이, 겨울방학 해외전지훈련 청백전에서 2루수가 비어 인원수만 채우러 나갔는데, 타격훈련 한 번 하지 않고 홈런 2개를 날렸다. 팔이 다 나을 때까지만 타자를 해보자고 했다가 여기까지 왔다.

 

잘 나갔던 투수가 마운드를 내려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투수가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외야수로 전향했다.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프로에 지명되지 않아 상실감에 마음의 상처가 심했다. 다행히 단국대에 진학했고 기대 이상으로 잘했다. 당시 외야수가 신인드래프트 2차 1번에 지명된 건 11년 만이라고 들었다.

 

단국대를 거친 것이 오히려 더 잘된 셈이다.

프로에 지명되지 않았을 땐 야구를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프로선수에 대한 꿈을 저버릴 수 없어 대학 생활 4년 동안 꾹꾹(!) 참으며 견뎌냈다. 그곳에서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나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룸메이트는 송산 형이었고, (오)승환이 형의 라면을 많이 끓였었다. 지금은 쳐다볼 수도 없고! (웃음) 승환이 형을 잘 따랐고 지금도 자주 연락한다. 좋은 동료들 덕분에 좋은 성적을 내어 프로 입단의 꿈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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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서울에서 살다가 광주가 연고지인 구단에 지명됐다. 기분이 어땠는가.

깜짝 놀랐었다. 당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구단들이 많았기에 1순위로 호명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KIA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구단과는 달리 KIA에서는 전화 한 통밖에 안 왔었다. ‘좋은 소식 줄게’라는 딱 한 마디만 하고 끊었다. 설마 나를 지명할까 했는데 KIA에서 뽑아줬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야구하고 있다.

 

KIA 신인타자로는 최초로 개막전 4번 타자로 출전했었다.

나에게도 엄청난 자부심이다. 입단 당시만 해도 나름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들어왔지만 이종범 선배님, 최희섭 선배님, 장성호 선배님 등 이름만 말해도 굉장한 선배들이 많았다. 그런데 조범현 감독님께서 장성호 선배님과 최희섭 선배님 사이에 오른손 타자를 넣고 싶어 하셨고, 스프링캠프 때부터 (김)주형이와 4번 타자 자리를 두고 경쟁시키셨다. 운이 좋게 캠프와 시범경기에서 잘 쳐서 계속 4번 타자로서 뛰었다.

 

그날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의 타격코치님이 지금의 박흥식 코치님이다. 대구 개막전에서 스타팅 라인업을 미팅이 아닌 훈련시간에 호명하셨다. 코치님은 스트레칭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직접 가서 알려주셨는데, 첫 번째로 (이)용규에게 가시길래 스타팅 멤버를 말씀하시나보다 했다. 그런데 네 번째에 나에게 오시는 것이 아닌가! 설마설마했는데 코치님께서 내가 오늘 4번 타자라고 말씀해주셨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긴장했었다.

 

떨고 있던 신인선수에게 조언해주는 이가 있었는가.

그때 당시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래서 지금 잘하고 있는 신인이나 성장하는 선수들의 기분을 알 것 같다.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이겨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 누구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뭐라 물어보기도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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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장 위한 승부차기 

 

실전은 달랐고 결과는 처참했다. 이제 막 프로에 데뷔한 ‘꼬꼬마’ 나지완이 상대의 전력분석에 완전히 간파 당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나지완은 짧은 1군 생활을 마치고 2군행을 통보받았다. 프로 무대는 아마야구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짐을 챙기던 나지완은 패배의 요인이 자만심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고치고 초심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깨달음이 현재까지 성공 가도를 달리는 비결이다.

 

초반 1군과 2군을 오갔지만 다른 신인들에 비해 시작이 좋았다.

개막전부터 4번에서 치고 캠프와 시범경기에서 잘 쳤다 보니 상대투수를 얕잡아봤던 것 같다. 그러다 내 약점을 걸려버렸고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열흘 뒤에 다시 1군에 올라왔지만, 며칠 뒤 또 짐을 쌌다. 자만했던 것이 문제였다. 마음가짐을 바로 잡으려고 주문을 걸었었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스스로 잘 이겨낸 데뷔 첫 시즌이었다.

운이 좋았다. 하루는 황병일 타격코치님이 방으로 불렀다. 올해는 1군에 더 이상 올라가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유를 물으니, 나를 키워야 하는 구단의 입장이 내가 더 망가지는 것을 못 보겠다는 것이었다. 2군에서 완벽하게 준비한 뒤 내년을 기약하자고 하셨다. 그런데 운이 따라주면 그때 기회를 잡으란 말이 맞다. 코치님과 이야기가 끝나고 30분 뒤 1군 매니저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상선수가 생겼으니 짐 챙겨서 1군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짐을 챙겨 청주로 갔다.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화전 9회초 2아웃 상황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앞 타석에서 병살타를 쳐서 그냥 짐을 싸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또 기회가 왔다. 김원섭 선배가 2루서 홈으로 들어오다 (강)민호와 부딪혀 구급차에 실려 갔다. 그때 외야수로는 최경환 선배와 내가 있었다. 최경환 선배가 먼저 캐치볼을 했는데 이강철 코치님이 혹시 모르니 몸을 풀라고 하셨다. 잠시 후 수석코치님이 우리 쪽을 향해 손짓하셨다. 최경환 선배가 뛰어나가니 코치님이 선배가 아닌 나에게 나가라고 하셨다. 그날 4타수 3안타(1타점 2득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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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지완이란 선수를 만들어준 경기였다.

그때의 3연전이 내 야구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바로 3번 타순으로 자리를 옮겨 3연전 동안 12타수 9안타를 때려냈다. 데뷔 첫 홈런도 기록했었다. 시즌 초반 2군을 오갈 땐 타율이 1할대 초반이었는데 전반기가 끝날 때 보니 3할2푼대였다. 엄청 몰아치기를 했었다. 그때의 기운으로 FA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선수가 신인 때 잘해도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는다. 그런데 보란 듯이 이겨냈다.

내 성격이 누가 뭐라 해도 소심해지지 않는다. ‘너는 너대로 해라, 나는 나대로 하련다’란 것이 강하다. 내 인생에 야구가 전부라는 생각으로 야구만 묵묵히 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이 돼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그때의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고 있다.

 

그 꼬꼬마가 2009년 한국시리즈의 영웅이 됐었다.

나지완이란 선수의 이름을 각인시켜줬다. 8년이 지나도 다들 그 이야기밖에 안 한다. (웃음) 이젠 그만 듣고 싶다. 다시 한번 우승해서 ‘새로운’ 나지완을 탄생시키고 싶다. 2009년 ‘꼬맹이’ 나지완이 주연이었다면, 2017년에는 고참급 선수로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뒤에서 묵묵히 조언해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

 

이미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김주찬, 이범호 등 주축선수들이 전력에서 이탈했을 때 임시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형들이 없을 때 임시 주장을 하면서 선후배, 코칭스태프의 중간역할을 하려고 했다. 내가 선수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코치님과의 소통을 위한 다리 역할과 내 자리에서 묵묵히 야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선수범해야 후배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고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 나에 대한 평가는 제 3자가 할 것이다.

 

KIA의 성적이 좋은 데는 나지완의 역할이 크다. 개인 성적이 팀 성적에 한 몫 거들고 있다.

더 잘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고 미안하다. 나도 그렇지만 다들 잔부상을 가지고 있다. 주찬이 형과 범호 형의 공백을 느꼈듯 주축선수들이 없으면 큰 부담이 온다. 원활한 팀 로테이션을 위해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팀 성적이 말해주듯 별 탈 없이 잘 되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 지금 팀이 일등 하고 있는 것이 가장 기분이 좋다.

 

그런데 타격에 비해 수비에서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인정한다. 누구나 그렇듯 가끔 감각을 잃어버리면 혼란스러워한다. 그때마다 감독님과 수비 코치님이 자신 있게 하라고 말씀해주신다. 이전에 비해 올해 좀 많이 나가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팀이나 나에게 플러스 요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이젠 나도 수비 부담은 전혀 없으니 내보내주시면 열심히 잘할 수 있다. 팀에 보탬이 되고 싶다.

 

KIA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느껴진다. FA 때 원구단에 남은 이유도 이 때문인가.

돈도 중요하지만, KIA에서 많은 추억을 남겼고 무엇보다 나의 이름을 각인시켜줬다. 내가 보답해야 하는 팀이다.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기에 나가고 있다. 좀 더 잘해서 KIA의 레전드가 되는 것이 마지막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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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명적인 반전매력 

 

검투사 헬멧, 유독 몸에 맞는 공이 많아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지완이 살기 위해 특수 제작한 보호 장비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는 그가 얄미워서 상대 투수가 일부러 맞춘다는 것. 이러한 비난과 오해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지완은 대인기피증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야구쟁이’들 사이에서는 그저 귀여운(?) ‘아싸! 호랑나비’다. 선수들은 보기와 달리 순박하고 개그본능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6시즌 연속 몸에 맞는 공이 많다. 유난히 많이 맞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올해 특히 많이 맞고 있다. 몸쪽 공을 못 친다는 약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알지만 투수들이 조금만 벗어나면 실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좀 더 붙이다 보니 사구로 이어진 것 같다. 하도 맞으니까 코치님들이 ‘네가 잘 치니까 맨날 맞는 거다’라며 나 듣기 좋으라고 말씀하신다. 팀이 이길 수만 있다면 이 정도 희생은 이겨낼 수 있다. 묵묵히 이겨내는 것이 내 역할이다.

 

지난 5월 27일 롯데전에서 한 이닝에 두 번이나 공에 맞았다. 그때 화를 내기보단 투정을 부리듯 포수 강민호를 때렸다.

한 회에 두 번이나 공에 맞는 건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맞는 사람으로서는 많이 화가 난다. 그렇지만 그때 투수가 나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린 후배였다. 워낙 친한 민호한테 땡깡 아닌 화풀이를 했었다. 민호도 정말 미안해했다. 제가 바깥쪽에 강하기 때문에 몸쪽을 공략하려다가 맞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못 맞으면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 부상으로 인해 한 시즌을 망칠 수도 있다.

작년부터 검투사 헬멧을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근 많은 선수가 이 헬멧을 쓰고 있고 다른 선수들도 이것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팬들은 공에 대한 무서움을 잘 모를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공도 있기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쓰게 됐다. 몸에 맞는 공은 민감하다. 예전에 이것 때문에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난 적이 있다. 분명 흥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질타를 받았었는데, 그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하고 싶진 않다. 그저 묵묵히 야구를 하며 팀을 위해 희생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온순한 면이 있다.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선수들에게는 인기가 좋더라.

내 자랑을 조금 하겠다. (웃음) 유독 올해 타 팀에서 온 선수들이 많다. (이)명기와 (김)민식이는 내가 정말 악당일 줄 알고 무서웠다더라. 그런데 겪어보니 전혀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다. 선배들도 상대팀에 있을 땐 나의 외면만 보고 안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팀에 있고 술 한 잔 하며 대화를 나누다보니 나에게 이런 면(=좋은 부분)이 있다며 의외란 반응을 보였다. 보이는 이미지가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가끔 변했단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이미지를 바꾸는데 쉽진 않겠지만 야구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나지완으로 봐주시길 바란다.

 

한 가지 더 의외인 사실이 있다. 보기와 달리 은근히 근육맨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하고 있다. 내 자랑을 또 해도 되는가? (웃음) 내가 우리 팀에서 근육량이 제일 높다. 골격근량이 50%를 넘는데 이는 우리 팀 내에서 버나디나와 나 둘뿐이다. 체지방이 내 몸무게에 20%를 차지한다. 여기서 모 선수를 이야기하자면,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 나랑 정말 똑같이 생겼다며 아주 똑같다고 하는 우리 팀 4번 타자는 체지방이 30%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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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본인의 성격은 어떤가.

형들을 내가 이끌고 (웃음) 테두리 안에서 스스럼없이 두루두루 잘 지낸다. 단순하기도 해서 바로바로 잊어버린다. 단점 아닌 단점이라면 마음이 조금 약하다.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착한 사람은 운동을 잘 못한다’는 말을 한다. 10년째 야구를 하면서 한 경기에서 안타를 못 치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소심해지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김)선빈이와 (안)치홍이는 좋게 말하면 ‘내가 맞네’라는 마인드가 강하다. 그들이 나보다 후배지만 배워야 하는 부분이다. 프로선수라면 이러한 정신이 분명히 필요하다.

 

밝고 재밌지만, 반면 혼자 끙끙 앓는 성격이다.

겉으로는 잘 웃고 밝으니 사람들이 내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른다.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인천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2015년에 멘탈이 완전히 나갔었다. 수술도 많이 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검사 결과 공황장애 증상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내 욕을 하는 것 같아 두려웠다. 야구장에 가면 숨고 싶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비난이 올 것이란 불안감에 이를 이겨내는데 힘들었다. 그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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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결과, 이젠 ‘나비’란 별명도 긍정의 의미로 바뀌었다.

‘나비’가 처음엔 안 좋은 의미였다. 하도 못하니까 함평 가서 ‘나비 축제나 봐라’란 뜻이었다. 함평이 나비 축제가 유명하니까 가서 오지 말라고, 그때 별명이 ‘함평나비’였다. (웃음) 이젠 내 별명 ‘나비’가 좋다. ‘나비’란 단어를 검색해보니 좋은 단어와 표현이 많더라. 요즘 팬들에게 나비 스티커를 많이 받는다. 항상 감사한 마음뿐이다.

 

FA 1년 차다. 남다른 각오가 있을 것 같다.

처음엔 FA만 하자란 생각이 컸다. 막상 하고 보니 부담이 더 크다.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란 각오는 식상하다. 현재 타순이 정해져 있지 않다. 어느 타선에서든 내 역할을 할 것이다. 야구장에서 최선이 아닌 결과로 보여드릴 것을 약속한다.

 

올 시즌 KIA의 가을야구를 기대하는 팬이 많다.

2016년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지만, 팀 성적이 떨어져 팀과 팬들에게 미안했다. 절대적으로 팀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 내 성적이 어느 정도 따라와 준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현재 전 선수가 잘 해주고 있다. 나도 팀이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겠다. 우승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조언해주는 선배가 되어 마운드 위에서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는 한 해를 보내는 것이 꿈이다. 더운 날씨에도 야구장을 많이 찾아주셔서 감사하다. KIA 챔피언스필드에서 팬들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나지완은 올시즌 한국시리즈 우승 공약으로 양현종, 최형우와 함께 마운드에서 아이돌 춤을 추기로 했다. 물론 이는 이범호와 김주찬의 아이디어다. 고참급 선수가 많은 이들 앞에서 춤을 춘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싫지도 않다고 했다. 그는 ‘광주의 아이돌’ 양현종에 ‘광주의 아재’ 나지완과 최형우를 상상해보라며 껄껄 웃었다. 우승만 한다면 기꺼이 모든 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이란 말이 가장 행복하다는 한 ‘나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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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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