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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사와무라상에 얽힌 NPB의 그늘 비즈볼프로젝트

류지호 (gulakk***)
2016.07.0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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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파이브 2

[비즈볼 프로젝트 김윤호] 미국 MLB에 사이영상이 있다면, 일본 NPB에는 사와무라상이 있다. 1947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한 사와무라상은 사이영상보다 역사도 더 길며, 일본 야구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영예이다. 일본의 선발 투수들에게 사와무라상 수상은 재팬시리즈 우승 이상의 명예를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사이영상 수상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듯이, 사와무라상이라고 해서 논란을 피할 수는 없다. 아니, 사와무라상은 수상자 선정에서 오히려 사이영상보다 더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그 논란이 결코 ‘A가 B보다 더 잘했다’와 같은 식의 논란이 아니라, 일본 야구계의 뿌리깊은 문제점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무겁다.


일본 프로야구의 수준과 관계없이 일본 야구계에 스며들어 있는 오랜 문제점이 발견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사와무라상의 현주소에 대한 탐구는 꽤나 가치있는 일이다. 사와무라상의 역사에서 우리가 일본 야구계의 어떤 문제점을 들여다볼 수 있는지 알아보자.


 

유명무실한 수상기준과 억울한 선수들


1981년까지 기자 투표로 선정되었던 사와무라상은 1982년부터 선정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 전직 일본 프로야구 투수 출신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가 생겼고, 이 위원회에서의 투표에 따라 수상자가 선정된다. 이처럼 선정 방식이 바뀐 이유는 1981년 사와무라상 수상 논란 때문이었다.


1981년 시즌 최고의 투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에가와 스구루였다. 에가와는 1981년에 무려 투수 개인 기록 5관왕을 달성하며, 사와무라상 수상이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수상자는 같은 팀의 투수였던 니시모토 다카시*였다. 두 사람의 1981년 기록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작년에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를 역임했던 그 사람이다.


 

<에가와 스구루 vs. 니시모토 다카시>

에가와 스구루

20승 6패 ERA 2.29 221탈삼진 20완투 240.1이닝 승률 76.9%


니시모토 다카시

18승 12패 ERA 2.58 126탈삼진 14완투 257.2이닝 승률 60.0%


※ 붉은 글씨는 시즌 1위 기록


 

육안으로 보아도 에가와의 기록이 돋보인다. 그러나 기자들은 니시모토의 손을 들어줬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1981년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1966년의 경우 당대 최고의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한신 타이거즈)에게만 상을 준 것이 아니라, 호리우치 쓰네오(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도 상을 주기도 했다. 1명의 투수에게만 준다는 원칙을 깬 공동 수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 인기 투표로 변질되자 NPB 사무국에서 변화를 택한 모습이었다.


1982년 이후부터 사와무라상 수상을 위한 선정 기준으로 총 7개의 기준 항목을 발표했다. 그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선발 등판 25경기, 완투 10경기, 15승, 승률 6할, 200이닝, 탈삼진 150개, ERA 2.50


위 항목을 얼마나 채웠느냐를 우선적으로 참고하며, 항목을 제대로 충족한 투수가 없으면 수상자를 아예 선정하지 않기도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수상 기준 항목 발표 후, 1984년과 2000년에는 7개 항목을 제대로 충족시킨 투수가 없어서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아예 없었다. 그만큼 사와무라상 시상에 있어 이전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준 항목 적용 외의 요소가 개입되기 시작했다느 점이었다. 기준 항목을 충족시킨 부문이 더 적은 데도 사와무라상을 시상하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역사상 이러한 사례가 총 7차례 발생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포인트는 더 많이 쌓았는데…>

1992년

이시이 타케히로(4개 항목 충족) : 사와무라상 수상

노모 히데오(6개 항목 충족)


1994년

야마모토 마사히로(5개 항목 충족) : 사와무라상 수상

이라부 히데키(6개 항목 충족)


2008년

이와쿠마 히사시(6개 항목 충족) : 사와무라상 수상

다르빗슈 유(7개 항목 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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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이시이의 경우, 정규시즌 이닝이 148.1이닝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탈삼진도 123개밖에 되지 않았다. 승률(83.3%) 부문을 제외하면 정규시즌 기록에서 1위를 차지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 노모는 1992년에 216.2이닝을 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탈삼진도 228개를 기록했다. 최다 이닝과 탈삼진 모두 퍼시픽리그 1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모는 사와무라상 수상에 실패했다.


2008년 사와무라상 수상도 논란으로 남았다. 7개 항목을 모두 충족시킨 다르빗슈가 사와무라상 수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을 수상했던 이와쿠마는 7개의 기준 중 완투 항목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완투 5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 이와쿠마에게 돌아갔는데, 일각에서는 다르빗슈의 2년 연속* 사와무라상 수상을 견제하기 위한 투표라는 의견까지 제시될 정도였다.


*다르빗슈는 2007년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1982년 이후, 사와무라상 기준 항목 7개를 모두 충족시킨 선수는 9명밖에 없다. 그런데 이 기준을 충족시킨 선수 중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하지 못한 선수가 2명인데, 바로 에가와와 다르빗슈였다. 특히 다르빗슈는 2008년뿐만 아니라 2011년에도 7개 항목을 모두 충족시키고도 사와무라상 수상에 실패했는데, 당시의 수상자는 다나카 마사히로였다. 그러나 다나카 또한 7개 항목을 모두 충족시켰기 때문에 2008년보다는 덜 억울할 듯 하다.


이처럼 수상기준이 명백하게 존재하는데도 자의적인 투표가 계속될 정도로 사와무라상에 대한 잡음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잡음의 이면에는 일본 야구계의 차별 아닌 차별 문화가 존재한다. 요미우리 중심으로 돌아가는 야구 행정, 특정 선수에 대한 노골적 견제 등이 일본 야구계의 공정성을 지속적으로 위협한다. 더구나 어떤 해에는 중요하게 적용되었던 기준이 다른 해에는 중요하게 적용되지 않는 등 기준의 가중치도 들쭉날쭉하다.


이렇듯 기준의 주관적인 적용으로 인해 억울한 선수를 만들어내는 사와무라상은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1994년에 야마모토 마사히로(주니치 드래곤스)가 사와무라상을 수상했을 당시의 선정위원회에 주니치의 전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시상 과정에서의 차별이 아예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차별적 문화가 사와무라상 시상 과정에 숨겨져 있었다는 추측들이 조심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이유다.


 

‘후발주자’ 퍼시픽리그의 독주 이유


퍼시픽리그 투수들은 1990년이 되어서야 사와무라상 수상이 가능했다. 사와무라상이 1947년에 생길 당시에는 퍼시픽리그가 없었을 뿐더러, 좀처럼 센트럴리그를 따라가지 못하는 퍼시픽리그의 인기 때문에 관심을 받지 못했다. 또한 90년대까지도 사와무라상의 영광 대부분은 센트럴리그 투수들의 몫이었다. 1990년부터 1999년까지 퍼시픽리그 투수가 사와무라상을 차지한 시즌은 세 번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완전히 다르다. 2005년 이후 총 11번의 사와무라상 중 무려 9번이 퍼시픽리그 투수들의 차지였다. 투수 기량의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진 것이다. 퍼시픽리그와 센트럴리그 간의 실력 차가 커진다는 비판의 근거 중 하나도 이러한 투수들의 실적 차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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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 보아도 양 리그 간의 투수 차이가 느껴진다. 게다가 퍼시픽리그의 특정 팀에서 상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퍼시픽리그 6팀 중 5팀에서 사와무라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상의 배분도 고른 편이다. 반면 센트럴리그에서는 당시 히로시마에서 뛰었던 마에다 켄타만이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마에다 외에는 센트럴리그에서 사와무라상을 탈 만한 투수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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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넓게 말하면 퍼시픽리그와 센트럴리그 간의 경쟁력 차이가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양대리그의 존재가 무색할 정도로 한 쪽이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고 있다. 심지어 양대리그 간의 교류전에서도 퍼시픽리그가 지속적으로 우위에 있다. 교류전이 처음 시작된 2005년 이후 센트럴리그가 전적에서 앞선 시즌은 2009년 시즌밖에 없다. 물론 센트럴리그의 인기는 여전하지만, 지금과 같은 실력 차가 발생한다면 이제는 그 인기조차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퍼시픽리그가 실력적으로 앞서나가게 된 것일까? 답은 리그 별로 추구하는 야구 스타일의 차이에 있다. 센트럴리그의 투수들은 철저히 상대의 약점을 파고든다. 상대 타자가 몸쪽 공에 약하다 싶으면, 몸쪽 승부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과거에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 뛸 때, 상대 투수들이 몸쪽 승부만을 고집하여 이승엽의 멘탈을 흔들었던 사례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요컨대 센트럴리그의 선수들은 철저하게 상대성을 고려한 맞춤형 승부를 펼친다. 그것이 센트럴리그의 ‘야큐(야구의 일본식 발음)’라고 보면 된다.


반면 퍼시픽리그 투수들은 조금 더 메이저리그의 색깔에 가까운 강점 중심의 승부를 펼친다. 상대 맞춤형으로 투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무기와 커맨드를 토대로 하는 정면 승부를 지향한다. 뿐만 아니라, 퍼시픽리그는 1회부터 희생번트를 동원하며 한 점씩 짜내는 센트럴리그와 달리 빠른 강공으로 점수를 대거 내는 야구를 펼치는 경우가 많으며 선수 본인의 기본기 위주의 승부가 대부분이다. 퍼시픽리그 투수들이 국제 무대에서도 더 경쟁력 있는 이유도 이러한 기본기 위주, 강점 중심의 승부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퍼시픽리그의 야구가 좀더 현대적인 ‘베이스볼’에 가깝다.


센트럴리그 식의 맞춤형 승부는 분명 1점차가 중요한 단기전에서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장기적인 정규시즌 레이스나 선수의 기본기 향상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센트럴리그의 그러한 승부 경향이 투수의 경쟁력 제고를 가로막는다는 이야기이다. 투수가 모든 타자들을 일일이 약점 공략으로만 돌려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그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프로야구의 레벨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양 리그 간의 격차는 이러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센트럴리그 식의 고전적인 ‘야큐’는 점점 경쟁력을 잃어가는 반면, 퍼시픽리그 식 ‘베이스볼’은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상승시킨다. 양대리그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엔 ‘야큐’와 ‘베이스볼’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그만큼 사와무라상 타이틀 경쟁력의 차이도 커지는 중이다.


 

투수는 외로운 무사가 아니다


지난 해에 있었던 프리미어 12 경기에서 투수가 삼진을 잡을 때마다 경기장에서 칼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투수가 타자로부터 삼진을 잡는 것을 사무라이가 검으로 적을 베는 일도양단에 비유한 것이다. 일본 사회를 수백 년동안 지배했던 무사도의 흔적이 야구계에도 고스란히 베어 있는 셈이다. 일본의 야구 원로들 입장에서 보면 투수는 자신과 팀을 지키는 무사에 가까운 존재이다.


그래서일까? 일본 야구계는 유독 투수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어깨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는 말도 안 되는 명제가 오랫동안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계속된 신체 혹사에 따른 고통, 길어지는 경기로 인한 승부의 부담을 정신력으로 이겨내라는 의미이다. 고교 야구 팀의 감독들 중에서 투수들에게 매 경기 120개 이상의 공을 던지도록 지시하는 것도 모자라서, 50개의 불펜 투구를 별도로 지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생각은 사와무라상에도 반영되어 있다. 수상기준에 ‘완투 10회’가 포함된 것을 보면, 투수가 오래 던지는 것을 장려하는 문화가 일본 야구계에 강하게 남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투구 수 관리가 적절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완투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오래 던지는 것은 신체 혹사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완투 10회는 역대 수상자 가운데 달성한 선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기록이다.


<2000년 이후 완투 10회 이상 기록한 사와무라상 수상자>

마쓰자카 다이스케(2001년) : 12회

다르빗슈 유(2007년) : 12회

와쿠이 히데아키(2009년) : 11회

다나카 마사히로(2011년) : 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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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간 분업화가 진행될수록 완투 횟수는 자연히 줄어든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프로야구에는 보고도 믿기 힘든 완투 기록들이 많다. 1961년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곤도 히로시의 경우 완투 경기가 무려 32회나 되며, 노모 히데오는 1990년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할 당시에 29경기에 등판했는데 그 중에서 완투한 경기가 무려 21경기나 된다.


이렇게 오래 던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보니 부상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사와무라상을 위해 완투를 불사한 투수들의 경우, 부상 후유증을 겪기도 한다. 이와쿠마의 경우 2008년 사와무라상 수상 이후 한동안 잔부상에 시달렸고, 2014년 수상자인 가네코 치히로는 2014년 시즌 직후에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 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 있는 다르빗슈와 다나카 역시 메이저리그 진출 후에 팔꿈치 수술을 받은 바 있다.


기존에 사와무라상을 받은 선수들도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향후 사와무라상 수상이 유력한 투수들도 안심할 수 없다. 일례로 한신 타이거즈의 에이스인 후지나미 신타로는 지난 해에만 7경기에서 완투했다. 문제는 그 후유증으로 인해 올 시즌 평균 구속이 하락한 상태이다. 지난 시즌 평균 구속이 151km/h였는데, 올 시즌에는 146km/h 근처까지 떨어졌다. 일시적인 데드암 현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깨와 팔꿈치 혹사가 계속된 만큼 대형 부상을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상 때문에 대형 투수 유망주가 쓰러진다면 일본 야구계에도 큰 손해임에는 틀림없다.


더 이상 투수는 외로운 무사가 아니다. 엄청나게 많은 공을 던지면서까지 무리할 이유가 없다. 투수 분업화 시대에서 선발 투수가 경기 전체를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다. 투수들에게 구 시대의 무사도를 강요하는 건, 일본 프로야구의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뜻과도 같다. 아무리 유명무실해진 기준이라지만, 사와무라상에서도 이러한 완투 기준을 조금은 낮출 필요가 있다.

 

일러스트= 비즈볼 프로젝트 이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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