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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Interview 세계청소년야구대회 호주대표팀 코치 구대성 MEMORIES

dugout*** (dugout***)
2016.09.2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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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계속 던지고 싶어요

 

제35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 경기가 열리는 구의야구공원. 금방이라도 익어버릴 것 같은 무더위 속에서도 어린 선수들은 전력을 다해 플레이하고 있었다. 외국 선수들의 가족들도 그런 선수들을 위해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저 멀리, 한 외국 선수들이 모여 감독, 코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찾던, 낯익은 얼굴도 보인다. 한화 이글스의 전설로 남은 좌완 마무리투수 구대성 선수. 현재 호주 청소년야구팀의 코치이자 동시에 ‘시드니 블루삭스’의 투수로도 전천후 활약하고 있다. 69년생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 많이 바빠 보이는 그였지만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Photographer 황미노 Editor 황형순 Location 구의야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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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선수들에게 조언을 끝낸 구대성은 잠시만 시간을 내달라며 어디론가 향했다. 구대성의 소식을 듣고 꽤 많은 팬들이 줄을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대성은 일일이 팬들과 악수하고 그들이 가져온 야구공과 유니폼 등에 사인을 했다. 더운 날씨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팬들을 먼저 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레전드’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팬들의 요청에 전부 응해준 구대성은 다시 웃는 얼굴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올 시즌 개막전 이후에 4개월 만에 귀국입니다. 기분이 어떤가요?

호주에 있을 때랑 다를 게 없어요. (예전에 비해서 달라진 점도 없나요?) 달라진 게 있다면 야구장에서 선수들이 저를 못 알아본다는 정도? (웃음) 선수들이 많이 바뀌어서 제가 한화 선수들을 봐도 아는 얼굴이 몇 명 없어요.

 

 

호주에서도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무리투수로서 좋은 활약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이를 계속 먹다 보니 이제는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제가 목표를 ‘50살까지 선수 생활하기’로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는 호주 청소년대표팀의 코치로 계신데, 선수들에게 무엇을 주로 주문하나요?

한국 선수들이 배우는 게 빠르잖아요. 호주 선수들에게도 많이 보고 배우라고 주문해요. 저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라고요. 호주 팀에는 중학생뿐 아니라 고등학생도 있어요. 하지만 한국 선수들과 비교를 하면 모든 부분에서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납니다. 호주 선수들은 연습을 1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안 하거든요. 경기도 어쩌다 한 번 하게 되다 보니 실력이 빨리 늘기는 어렵죠.

 

 

그럼 이번 대회 목표는 어느 정도로 잡고 있나요?

성적보다 경험이 목적이라 특별한 목표는 없습니다.

 

 

코치와 선수, 둘 다 하고 계신데 뭐가 더 어렵던가요?

선수가 더 나은 거 같아요. 선수 시절에는 제가 직접 공을 던지고 저만 잘하면 됐어요. 그런데 코치는 선수들을 일일이 지도해야 하니까 차이가 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코치보다 직접 던지는 게 더 편해요.

 

아직도 손에서 공을 놓지 않고자 하는 구대성. 여전히 직접 던지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는 그에게도 흘러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하지만 그는 미처 은퇴를 선언하기도 전에 청소년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대단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겹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야구를 시작한 계기가 알고 싶어요.

제 형이 야구하는 것을 보고 저도 같이 하게 됐어요. 야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부터입니다.

 

 

그때 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뭘 하고 있었을까요?

야구를 안 했다면 다른 스포츠를 했을 거 같아요. 모든 스포츠를 다 좋아했기 때문에 종목이 뭐가 됐든 운동선수를 했을 겁니다. 사실 선수 시절에는 직접 야구를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경기를 잘 챙겨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코치 일을 시작한 이후에는 많이 챙겨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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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성 선수의 트레이드마크라면 역시 역동적인 투구폼이죠! 지금의 투구폼은 언제 갖게 되었나요?

제가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틀어서 던지지는 않았어요. 대학 선수 시절에 일본의 ‘노모 히데오’라는 선수가 굉장히 유명했는데요. 폼이 너무 특이해서 조금씩 따라 하게 됐습니다. 후에 일본에 진출했을 때, 상대편 코칭스태프가 제 팔 근육의 움직임만 보고도 구종을 가려내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노출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더운 날씨에도 긴 팔 언더셔츠를 입었고 투구폼도 더 비틀어서 던지게 됐어요. 우리나라에서 선수로 생활할 당시에는 그렇게 많이 비틀어 던지지는 않았죠.

 

 

구대성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모르는 팬들을 위해 잠시 현역 시절을 되돌아보죠. 한국에서 선발과 구원을 오가는 스윙맨으로 활약했는데 데뷔시즌인 93년을 제외하고 2001년 일본에 진출하기 전까지 매년 100이닝 이상, 3점대 이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어요. 이렇게 꾸준하게 활약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나요?

특별한 비결은 없고, 자신감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저도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당시에는 어깨 부상 때문에 재활과정을 거쳤는데, 본인이 안 아프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아프더라고요. 물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요. 지금 프로 선수들을 보면 예전 선수들에게서 보였던 끈기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96년에 주로 구원투수로 등판했는데도 18승을 올리며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세이브 부문 4관왕을 달성하고 정규리그 MVP를 차지하셨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선발투수한테 참 미안해요. (웃음) 다 이기고 있는 경기에 등판해서 동점 만들고, 다시 역전해서 팀이 이기면 제가 승리를 챙기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투구 이닝이 많았기 때문에 점수를 안 주기는 힘들었어요. 그런데 유독 그 해에는 동점을 헌납하고 승리를 챙겼던 경기가 많았습니다.

 

 

99년에는 한화 우승 당시 한국시리즈 전 경기에 출장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석권하셨어요. 새삼스럽지만 우승할 당시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굉장히 좋았죠. 팀 창단 첫 우승을 했으니까요. 다른 분들은 많이 우시더라고요. 빙그레 이글스 당시에 준우승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 전까지 4강에 올라가 본 기억도 거의 없어서 (웃음) 우승했다는 기분은 잠깐이었어요. 생각보다 우승했다는 기쁨이나 여운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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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150개가 넘는 투구수로 완투하며 한일전을 승리로 이끌었어요. 담 때문에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완투를 하신 건가요?

한일전 이전에 미국과 준결승전이 있었는데, 경기 전에 자고 일어나니까 담이 왼팔 앞뒤로 다 왔어요. 숨을 쉬거나 걷는 것도 힘들 정도였죠. 팔도 들리지 않으니 공을 전혀 못 던지겠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투수코치를 맡고 계셨던 김인식 전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막상 미국전에서 긴박한 상황이 되니 준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웃음) 경기 끝나고 새벽 3시쯤 숙소에 들어가서 피까지 뽑고 나니 2시간 밖에 잠을 못 잤어요. 자고 일어나니 담은 생각보다 많이 나았지만 여전히 던지는 건 힘들었죠. 그런데 경기장에 가니 제가 일본전 선발투수라는 거예요. 그래서 던져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최선을 다해서 하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저도 던질 수 있을 때까지는 던져보자고 마음을 먹고 처음에는 힘을 빼고 던졌어요. 그런데 던지다보니 저도 모르게 팔이 점점 잘 돌아갔어요. 그래서 조금씩 강하게 던지기 시작했고 공이 점점 빨라지니까 일본 타자들이 치기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정신력과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겠네요.

사실 공을 몇 개를 던졌는지도 몰랐어요. 9회에 연속 안타로 1점을 내줬는데 김인식 감독님이 올라오셨어요. 제가 하나만 더 맞으면 바꿔달라고 했는데 그땐 너무 늦는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럼 안 맞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끝까지 던지고 마무리 짓고 싶었어요.

 

 

그 경기를 완투승으로 장식하고, 앞서 있었던 일본과의 8강전도 그랬지만 일본전에 상당히 강했어요. 2006년 WBC(World Baseball Classic)때도 그랬고요. 그래서 일본 킬러라는 별명이 추가됐죠.

저는 일본전에서 그렇게 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진 경기가 더 많을 거예요. (웃음) 하지만 대학교나 고등학교 시절에도 일본 팀과의 경기에서 큰 점수 차로 패배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올림픽이나 WBC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3점만 낸다면 이길 수 있다고 항상 이야기했죠.

 

 

일본 진출 후에는 주로 선발투수로 활약했는데 한국 야구와 비교하면 어떤 점이 다르던가요?

훨씬 더 정확해요. 타자들은 삼진 당하는 확률이 적었어요. 배트에 공을 맞히는 배트 컨트롤이 우리나라보다 한 수 위였죠. 투수들도 구속은 비슷했지만 공끝이 상당히 좋았고요.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에 입단하면서 중간계투로 활약하고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도 때렸지만 홈 슬라이딩 때 부상을 당하면서 오래가지 못했어요. 많이 아쉬웠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홈 슬라이딩을 시도했던 그때가 좀 아쉬워요. 당시 상황에선 저도 모르게 뛰었던 건데, 그렇게 다치고 난 후로 다른 투수들에게 절대 그런 행동은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더 오래 뛸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후회도 있어요. 일본 진출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좀 더 젊었을 때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최근 메이저리그 진출하는 선수들이 많아요. 그 선수들에게 선배로서 조언해주고 싶은 점이 있다면요?

선수들하고 잘 어울리고 싶다면 본인이 먼저 다가가야 해요. 그렇게 한다고 다른 선수들이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한국식 바비큐를 아주 좋아하니까 고기 구워 먹을 때도 동료 선수 몇 명 초대해서 같이 먹으면 금방 친해질 수 있어요. 어려울 게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서 대부분의 선수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그리고 메이저리그 훈련은 자율식이에요. 때문에 우리나라 선수들도 스스로 많이 뛰고, 컨디션을 잘 조절했으면 합니다. 또 동양인을 깔보는 선수들이 간혹 있어요. 해외 진출하는 선수들에게도 얘기하지만, 그런 선수들 앞에서는 얌전하게 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강하게 나가야 할 때는 강하게 나가야죠. 그래야 그 선수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아요.

 

 

리그를 수차례 옮긴 만큼, 누구보다 치열하게 선수 생활을 했던 구대성의 강인함은 후배들을 위한 조언에서도 드러났다. 2006년 WBC 일본전에서 스즈키 이치로(현 마이애미 말린스)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지도록 주문한 일화는 유명하다. 많은 벤치 클리어링 사건에 관련된 것도 자신과 자신의 팀을 얕보는 행동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의 선수 생활 내내 보여준 강인함과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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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로 복귀해 5년을 더 뛰고 호주리그에 진출했습니다. 더 던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텐데요.

자신은 있었어요. 하지만 개인사정상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은 정리하기로 했죠. 친척이 호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호주에 프로 리그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한화 구단 측과 이야기하고 호주로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호주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음식이나 문화 등은 적응할 만했나요?

음식은 집에서 대부분 먹었기 때문에 문제없었고, 문화는 미국과 같았어요. 실력적인 부분에서만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문화적인 차이는 없었어요.

 

 

최근 호주 출신 메이저리그 선수가 늘어나고 있어요. 호주리그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대표팀과 붙었을 때 누가 이길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지금도 저와 같이 뛰는 선수들 중에 96마일을 던지는 투수도 있어요. 우리나라보다 스피드는 더 나오지만 변화구나 제구력 면에서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죠.

 

 

이혜천 선수 역시 호주(애들레이드 바이트)에서 뛰고 있죠.

네.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호주로 오기 전에는 몇 번 봤지만 아쉽게도 경기에서 맞붙을 일은 없었습니다. 시드니로 왔을 때도 연락이 잘 안 돼서 만나지는 못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해는 언제인가요?

한국에서 뛰었을 때를 생각하면 4관왕 차지했던 1996년도고요.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해는 대부분 기억에 남아요. 99년도 한화에서 우승했을 때, 그리고 미국에서 뉴욕 양키스 전에 등판했을 때도 기억에 남네요.

 

 

류현진 선수에게 체인지업을 전수하신 것으로도 유명해요.

딱히 전수한 건 아니에요. (웃음) 현진이가 좋아했던 선수는 송진우 선배님(현 KBS N Sports 해설위원)이었어요. 본인도 그렇게 인터뷰를 했고요. 그런데 하루는 저를 찾아와서 체인지업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어요. 저는 “네가 좋아하는 선수가 떡하니 옆에 있는데 왜 나한테 가르쳐달라고 하냐”고 했죠. (웃음)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저를 한 달 동안 쫓아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캐치볼하면서 제가 직접 던지는 체인지업을 가르쳐줬는데 그 그립을 잡기에는 현진이가 손이 많이 작았어요. 그래서 그립만 알려주고 직접 실밥을 돌려가면서 바꿔 던져보라고 주문했죠. 똑같은 그립이라도 본인의 입맛에 맞는 실밥 위치가 분명히 있거든요. 그렇게 스스로 연습하다 일주일 만에 터득했던 거로 기억해요. 습득이 빨랐던 거죠.

 

 

당시에 류현진 선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몸만 보면 둔해 보이는데 투구하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투구할 때의 유연성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우리가 흔히 스트레칭을 할 때 쓰는 유연성과는 또 달라요. 그런데 최근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부상 복귀 시점을 너무 빨리 잡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본인은 다 나았다고 생각해도 몸은 그렇지 않을 수 있거든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복귀 시점을 뒤로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선발과 마무리, 두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셨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요?

개인적으로는 선발투수가 좋습니다. 야구를 오랫동안 하면서 마무리투수도 재밌는 부분이 있다는 걸 분명 느꼈지만, 둘 중 하나만 택하라면 선발투수를 고르겠습니다. 일단 마음이 편해요. 선발투수는 맞아도 타자들이 분발해주면 이길 수 있어요. 하지만 중간계투나 마무리투수는 맞아서 역전당하면 ‘너 때문에 졌다’는 상황이 되잖아요. (웃음)

 

 

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이글스에서 한국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본인에게 이글스라는 팀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에게는 집이죠. 다른 팀에 갔다가도 돌아와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게 해준 팀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모든 선수들이 마찬가지일 거예요. 자신이 야구할 수 있게 해준 곳은 자신을 선택해준 본인의 팀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이글스에 대한 애착이 강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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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화가 좋은 성적을 거두며 5강을 위해 힘내고 있어요.

제가 시구를 하러 갔던 시즌 초반과 지금의 모습은 달라요. 선수들이 더 즐겁게 하는 것 같아요. 지금처럼만 한다면 5강안에 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팀 구성원을 보면 올라가야 마땅한 팀이니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감 있게 플레이하면 될 거예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50세까지 현역으로 뛰는 것이 목표라고 하셨어요. 여전히 변함이 없으신가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몸이 안 따라주네요. (씁쓸) 허리 쪽 디스크가 1번부터 5번까지 다 왔어요. 1번은 이미 굉장히 오래됐고요. 주사도 맞아가면서 던졌는데 의사가 이제는 하지 말라고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생각 중이에요.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리나라의, 특히 한화 팬들에게는 영원한 레전드 선수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감독이나 코치로도 레전드로 남아주길 원하는 팬들이 많을 텐데 본인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저는 저를 필요로 한다면 어디든지 갈 겁니다. 그 팀이 한화가 됐든 어디든지요. 지금도 호주에서 많은 선수를 가르치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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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불패’ 너무나 유명한 구대성의 별명이다. 물론 승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93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오랜 선수 생활 동안 그는 많은 경기에서 패했다. 그럼에도 구대성은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국내 복귀 후에는 또다시 호주로 무대를 옮기며 선수 생활을 위한 도전을 계속했다. 실패에 인색한 사회에서 끝없이 도전했던 구대성은 우리에게 도전하지 않는 것이 곧 실패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줬다. 그가 손에서 공을 놓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는 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것이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도전을 멈추지 않을 구대성의 ‘불패’ 신화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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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그아웃 매거진 65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16년 9월호(65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 www.dugoutmaga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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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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